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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과 도발 그리고 망각의 매직,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패션찬가 ④]

기사입력 2013.08.19 16: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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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닷컴 MK패션 윤상길 편집위원]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평소보다 립스틱을 진하게 바르는 행위는 헤어스타일의 변화처럼 여성들이 심경의 변화를 표현하는 무언의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현실 극복 방법의 한 행태인 셈이다. 고대 그리스 시인 메난드로스는 “립스틱은 매직이다”라고 노래했는데 이 표현처럼 여성은 립스틱을 통해 현실에서 마법과도 같은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외출하는 여성들에게 딱 하나의 화장품만 들고 가라고 한다면 둘 중 하나는 립스틱을 선택한다. 오래 전 방송되었던 ‘원더우먼’은 지금의 중장년층에게 인기 높았던 미국의 TV시리즈이다. 미스월드 USA 출신인 린다 카터가 연기한 ‘원더우먼’은 출동하기 전에 꼭 잊지 않고 하던 일이 있다. 정성스럽게 립스틱을 칠하는 일이다. ‘원더우먼’이 립스틱을 칠하는 이유는 반드시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렇듯 립스틱은 여성들에게 있어 화장품 그 이상의 사회학적 의미를 지닌다.

불경기의 소비 행태를 설명하는 이론 가운데 ‘립스틱 효과’(Lipstick Effect)라는 게 있다. 대공황기인 1930년대 미국 경제학자들이 만든 용어이다. 소비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립스틱 같은 저가의 미용 제품의 매출이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사치심을 충족할 수 있는 수단을 찾는다는 심리에서 비롯했다. 경기가 나빠져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고가의 물건들에는 지갑을 열지 않고 립스틱 같이 작고 저렴하지만 자기만족과 스스로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상품들에 돈을 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립스틱 효과‘에서 파생된 경제 용어에 ‘립스틱 지수’(Lipstick Index)가 있다. 미국의 화장품 회사인 에스티로더가 립스틱 판매량으로 경기를 가늠하여 발표하는 경제지표이다. 립스틱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분석할 수 있다니 립스틱은 한낱 미용 제품이 아니라 대중의 삶의 질을 나타내는 생활의 바로미터이다. 그래서일까. 대중의 희로애락을 가락에 실은 대중가요에도 립스틱은 훌륭한 소재가 된다. <내일이면 잊으리 꼭 잊으리 / 립스틱 짙게 바르고 / 사랑이란 길지가 않더라 / 영원하지도 않더라 / 아침에 피었다가 / 저녁에 지고 마는 /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아 / 속절없는 사랑아 / 마지막 선물 잊어 주리라 / 립스틱 짙게 바르고 / 별이 지고 이 밤도 가고 나면 / 내 정녕 당신을 잊어 주리라>

가수 임주리(본명 임윤정·56)의 대표곡 ‘립스틱 짙게 바르고’의 노랫말이다. 1987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지금도 노래방 애창곡 베스트10의 하나로 꼽힌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며 감성적인 제목과 가슴에 와 닿는 가사로 특히 40, 50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자리에서 어김없이 등장했던 이 노래에서 립스틱은 “까짓것, 잊어주마. 그래도 난 괜찮아.”라는 결의에 찬 자기위로의 도구이다. 애인을 떠나보낸 남자들은 술을 마시고 꺼이꺼이 울며 분노를 삭이지만 여자들은 거울 앞에 앉아 비장하게 립스틱으로 입술을 붉게 칠하기도 하는 것이다.

부부작가로 유명한 김희갑(작곡) 양인자(작사)가 만든 이 노래는 원래 이은하가 취입하기로 약속됐던 곡이다. 그런데 우연히 이들 부부 집에 들른 임주리가 피아노 건반위에 놓인 악보를 보고 노래가 너무 좋아 한번 불러보겠다고 했다가 임주리의 운명을 바꾸는 노래가 되었다. ‘립스틱은 매직’이라던 메난드로스의 말이 3천여 년이 지나 임주리의 현실에서 입증된 것이다.

이 노래는 당장 임주리에게 마법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정말 마법 같은 노래였다. 발표 당시 이 노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별로’였다. 임주리는 노래 발표 전이나 후나 여전히 무명가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이 풀리는 데 무려 6년이나 걸렸다. 1993년, 이 노래를 배우 김혜자가 MBC 연속극 ‘엄마의 바다’에서 불러 인기를 끌면서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미 절품된 앨범을 찾는 팬들이 줄을 이으며 새로 음반을 찍어내느라 공장 직원들은 밤샘 작업에 매달렸다.

노래가 알려지면서 당시 미국에 머물던 임주리는 한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1994년에 각종 인기차트에서 1위를 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또 한국노랫말 대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 이 노래는 한국DJ클럽이 집계한 1994년 인기곡 9위에 올랐다. 노래의 히트에 힘입어 임주리는 석도원 감독이 연출한 같은 이름의 영화에 출연, 잠시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임주리는 ‘사랑할 때 용서할 때’, ‘사랑의 기도’ 등을 가요 차트 상위에 연달아 올려놓으며 90년대 최고의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노래가 대박나면서 당시 립스틱 판매율이 30% 올랐다고 한다. T화학의 경우 립스틱이 불티나게 팔리자 임주리에게 고맙다며 립스틱을 박스채로 선물해 공연장에서 나눠주기도 했다. 94년 당시 임주리의 무대 공연료가 1회 3천만원에 이르렀을 만큼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는 법’, 인기도 오르고 수입도 만만치 않자, 여기저기서 유혹의 손길이 뻗쳐왔다. 소속사 관계자가 “노래도 떴으니까 화장품 사업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말에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다. 노래는 ‘대박’이었지만 사업은 ‘쪽박’이었다. 화장품 사업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그는 투자자에게 맡겨 사업을 시작했지만 투자자의 손실로 화장품 사업이 실패하면서 20억 원의 손해를 봤다. 그 당시에 신문에 기사가 실릴 만큼 떠들썩했던 사건으로 임주리는 그동안 벌어놓았던 돈에 은행 빚까지 생기면서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다.

립스틱으로 대박과 쪽박 사이를 오고간 임주리의 경우를 보면 “립스틱의 역사는 유혹과 도발의 역사이다.”라는 문화사가들의 지적은 옳다. 가수 김건모도 이 노래의 유혹에 빠져 도발을 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김건모는 지난 2011년 3월 MBC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립스틱 퍼포먼스를 보였다가 자신의 가요계 인생에 큰 상처를 입었다.

립스틱과 관련, 또 하나의 히트곡으로는 강애리자가 부른 ‘분홍 립스틱’이 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TV드라마를 통해 유명해졌다면 ‘분홍 립스틱’은 영화 ‘광복절 특사’에서 송윤아가 불러 널리 알려졌다. “그대를 처음 만난 날 / 남몰래 그려보던 분홍 립스틱 / ... / 눈물방울이 그 위를 적시며 / 분홍의 립스틱을 지워요.”란 ‘분홍 립스틱’의 노랫말처럼 립스틱은 눈부시게 사랑이 시작되던 날 수줍게 발라보기도 하고 흘러내리는 이별의 눈물에 속절없이 지워지기도 한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처럼 사랑을 잊기 위해 오늘 립스틱을 바르기도 하고, 내일 잊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법이기도 하다.

[매경닷컴 MK패션 윤상길 편집위원 news@fashionmk.co.kr / 사진=임주리 팬클럽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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